쓰보우치 미치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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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쓰보우치 미치노리는 일본의 야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1936년부터 1951년까지 선수로 활동하며, 이후 지도자로서 후진을 양성했다. 선수 시절에는 1948년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처음으로 1000경기 출전과 1000안타를 달성했으며, 2차례 도루왕을 차지했다. 은퇴 후에는 여러 프로 야구팀의 감독과 코치를 역임했다. 1992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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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보우치 미치노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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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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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에히메현 이요군 군추정 (현: 이요시) |
생년월일 | 1914년 4월 7일 |
사망일 | 1997년 9월 16일 |
신장 | 164 |
체중 | 60 |
利き腕 | 오른손 |
타석 | 오른손 |
수비 위치 | 외야수 |
프로 입단 연도 | 1936년 |
첫 출장 | 1936년 9월 18일 |
마지막 출장 | 1951년 10월 9일 |
선수 경력 | |
고등학교 | 구제 에히메현립 마쓰야마 상업학교 (중퇴) 구제 오사카 시립 덴노지 상업학교 |
대학교 | 릿쿄 대학 (중퇴) |
프로 | 대도쿄군 라이온군 아사히군(1936 - 1944) 골드스타 긴세이 스타스(1946 - 1948) 주니치 드래곤스 나고야 드래곤스(1949 - 1951) |
감독・코치 경력 | |
감독・코치 | 아사히군 (1944) 골드스타 긴세이 스타스 (1946 - 1948) 주니치 드래곤스 나고야 드래곤스 주니치 드래곤스 (1949 - 1954) 니시테쓰 라이온스 (1960 - 1962) 주니치 드래곤스 (1965 - 1967) 롯데 오리온스 (1972) 주니치 드래곤스 (1979 - 1986) |
수상 | |
선정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1992년) |
선정 방법 | 경기자 표창 |
2. 선수 경력
구제 마쓰야마 상업학교와 구제 덴노지 상업고등학교를 거쳐 릿쿄 대학에 진학했으나 중퇴했다. 1936년 대도쿄군 창단 멤버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937년 경기 중 입은 쇄골 골절 부상과 집안 사정 등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징병을 면제받았고[9], 1944년에는 선수 겸임 감독을 맡기도 했다.
전후인 1946년에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회 발족에 기여하고[3] 골드 스타를 창단하여 선수 겸임 감독으로 프로 야구계에 복귀했다. 이 시기 26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하기도 했으나, 후에 노구치 지로의 기록이 발견되어 공식 기록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1948년에는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로 통산 1000경기 출장과 1000안타를 달성하는 금자탑을 세웠다. 당시에는 이러한 기록에 대한 표창 제도가 없었으나, 쓰보우치의 기록 달성을 계기로 연맹 차원의 표창이 이루어지게 되었다[9].
1949년에는 코치 겸 외야수로 주니치 드래건스로 이적하여 활약했으며, 1951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지도자 생활을 이어갔다.
2. 1. 초기 경력
구제 마쓰야마 상업학교(현재의 에히메 현립 마쓰야마 상업고등학교), 구제 덴노지 상업학교(현재의 오사카 덴노지 상업고등학교)를 거쳐 릿쿄 대학에 진학했으나 중퇴했다.1936년에 동향 출신인 쓰쓰이 요시타케의 권유로[1] 대도쿄군의 결성에 참가하며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데뷔전인 같은 해 9월 18일 오사카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와카바야시 다다시를 상대로 프로 첫 안타를 기록했다.[2] 1937년에는 징병 검사를 한 달 앞두고 경기 도중 쇄골 골절 부상을 당했다. 이 부상으로 팔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되어 징병 검사에서 예비 요원으로 분류되었다. 또한, 주지였던 남동생이 출정하여 대신 절의 주지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야구 선수로서는 드물게 전쟁터에 나가지 않았다.[9] 일본 야구 연맹의 마지막 해였던 1944년에는 선수 겸임 감독을 맡기도 했다.
2. 2. 전성기
1937년 경기 중 쇄골 골절 부상을 당해 징병 검사에서 예비 요원으로 분류되었고, 주지였던 남동생의 출정으로 대신 절을 맡게 되어 야구 선수로서는 드물게 전쟁터에 나가지 않았다[9]. 일본 야구 연맹의 마지막 해였던 1944년에는 대도쿄군에서 선수 겸임 감독을 맡았다.전후인 1946년에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회 발족에 기여했으며[3], 골드 스타를 창단하여 선수 겸임 감독으로 프로 야구계에 복귀했다. 같은 해 26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했는데, 이는 당시 일본 기록으로 알려졌으나 1949년에 노구치 지로가 전년도(1945년)에 31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정정되었다. 쓰보우치의 연속 안타 기록은 9월 6일 한큐전에서 4타수 무안타로 중단되었는데, 당시 상대 투수가 바로 노구치 지로였다.
1947년 5월 3일, 일본국 헌법 공포를 기념하여 일본 야구 연맹으로부터 한신 타이거스의 와카바야시 다다시와 함께 특별 표창을 받았다. 이 표창에서 그는 '야구 명인'으로 칭송받았다[10][4].
1948년 9월 12일 난카이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최초로 통산 100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16일 뒤인 9월 28일 규에이 플라이어스전에서는 역시 사상 최초로 통산 1000안타 기록을 세웠다. 당시에는 이러한 기록을 축하하는 관례가 없어 시즌 종료 후 공식 기록원을 통해 알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연맹 차원의 1000경기 출장 및 1000안타 표창 제도가 마련되었다[9].
1949년에는 코치 겸 외야수로 주니치 드래건스로 이적하여 그 해 641타석에 들어서며 당시 시즌 최다 타석 기록을 세웠고(이 기록은 1950년 가네야마 지로가 경신), 597타수로 시즌 최다 타수 기록도 경신했다(이 기록은 1956년 사사키 신야가 경신). 팀명이 '나고야 드래건스'가 된 1951년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으며, 이 해에는 14개의 사구를 기록하며 일본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5].
3. 지도자 경력
쓰보우치 미치노리는 선수 시절부터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보였다. 1944년 아사히군에서 선수 겸임 감독을 맡았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인 1946년에는 골드 스타를 직접 결성하여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하며 프로 야구계에 복귀했다[9][3]. 1949년에는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조감독 겸 외야수로 뛰기도 했다.
1951년 현역에서 은퇴한 후에는 본격적으로 지도자의 길을 걸으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주니치 드래건스, 니시테쓰 라이온스, 롯데 오리온스 등 여러 구단에서 감독, 코치, 2군 감독 등 다양한 직책을 역임했다. 특히 주니치 드래건스에서는 감독뿐만 아니라 선수단 합숙소 사감을 맡아 선수들의 생활 지도에도 관여했다.
3. 1. 감독
쓰보우치는 1944년 아사히군에서 선수 겸임 감독을 맡으며 처음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6년에는 골드 스타를 결성하여 선수 겸 감독으로 프로 야구계에 복귀했고[9][3], 팀명이 긴세이 스타스로 변경된 1947년까지 감독직을 수행했다. 1949년에는 주니치 드래건스로 이적하여 조감독 겸 외야수로 활동했다.현역 은퇴 후에는 여러 팀에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갔다. 1952년부터 1953년까지는 주니치 드래건스 감독을 맡았다. 이후 니시테쓰 라이온스, 주니치 드래건스, 롯데 오리온스 등에서 코치 및 2군 감독을 역임했다. 특히 1979년부터 1986년까지는 주니치 드래곤스의 선수단 합숙소 사감을 맡으며 코치를 겸임하기도 했다.
쓰보우치의 주요 감독 및 코치 경력은 다음과 같다.
기간 | 소속팀 | 직책 |
---|---|---|
1944년 | 아사히군 | 선수 겸임 감독 |
1946년 ~ 1947년 | 골드 스타·긴세이 스타스 | 선수 겸임 감독[9][3] |
1949년 | 주니치 드래건스 | 조감독 겸 외야수 |
1952년 ~ 1953년 | 주니치 드래건스 | 감독 |
1960년 ~ 1961년 | 니시테쓰 라이온스 | 헤드 코치 |
1962년 | 니시테쓰 라이온스 | 1군 타격 코치 |
1964년 | 주니치 드래건스 | 코치 |
1965년 ~ 1966년 | 주니치 드래건스 | 헤드 코치 |
1967년 | 주니치 드래건스 | 2군 감독 |
1972년 | 롯데 오리온스 | 2군 감독 |
1979년 ~ 1986년 | 주니치 드래건스 | 사감 겸 코치 |
니시테쓰 코치 시절에는 아오키 아키라의 타격 지도를 맡아 기량 향상에 기여했다.[6] 주니치 사감 시절에는 엄격한 모습으로 선수들을 대했는데, 히라노 겐이 여러 차례 통금 시간을 어겨 꾸중을 들었을 때, 전임 사감에게 통했던 찹쌀떡을 건네며 용서를 구하려 했으나 쓰보우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는 일화가 있다.[7]
3. 2. 코치
1951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후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먼저 1952년부터 1953년까지 나고야 드래건스의 감독을 맡았다. 이후 여러 팀에서 코치를 역임했는데, 1960년부터 1961년까지는 니시테쓰 라이온스의 헤드 코치를, 1962년에는 1군 타격 코치로 활동했다. 니시테쓰 코치 시절에는 아오키 아키라의 타격을 지도하여 기량 향상에 기여했다.[6]
1965년부터 1966년까지는 주니치 드래건스의 헤드 코치를 맡았고, 1967년에는 2군 감독으로 활동했다. 1972년에는 롯데 오리온스의 2군 감독을 역임했다.
이후 1979년부터 1986년까지는 다시 주니치 드래건스로 돌아와 합숙소 사감 겸 코치를 맡았다. 사감 시절에는 매우 꼼꼼한 성격으로 알려졌는데, 당시 선수였던 히라노 겐이 통금 시간을 자주 어겨 혼이 났고, 전임 사감 이와모토 신이치에게 하던 것처럼 찹쌀떡을 건네며 용서를 구하려 했지만 쓰보우치는 "저는 받을 수 없습니다"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는 일화가 있다.[7]
쓰보우치의 주요 지도자 경력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소속팀 | 직책 |
---|---|---|
1944년 | 아사히군 | 선수 겸 감독 |
1946년 ~ 1947년 | 골드 스타·긴세이 스타스 | 선수 겸 감독 |
1952년 ~ 1953년 | 나고야 드래건스 | 감독 |
1960년 ~ 1961년 | 니시테쓰 라이온스 | 헤드 코치 |
1962년 | 니시테쓰 라이온스 | 1군 타격 코치 |
1965년 ~ 1966년 | 주니치 드래건스 | 헤드 코치 |
1967년 | 주니치 드래건스 | 2군 감독 |
1972년 | 롯데 오리온스 | 2군 감독 |
1979년 ~ 1986년 | 주니치 드래건스 | 사감 겸 코치 |
4. 기타 경력
1979년부터 1986년까지 주니치 드래건스의 합숙소 사감 겸 코치를 역임했다. 사감 시절에는 매우 꼼꼼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으며, 히라노 겐이 통금 시간을 여러 번 어겼을 때 엄하게 꾸짖었다. 히라노가 전임 사감에게 하던 것처럼 다이후쿠를 건네며 용서를 구하려 했지만, 쓰보우치는 "저는 받을 수 없습니다"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한다.[7]
드래곤스가 세 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한 1982년에는 TBS의 인기 프로그램 '더 베스트텐'에 출연하기도 했다. 당시 사감으로 있던 드래곤스 합숙소(아이치현 나고야시 나카무라구 소재)에서 생방송으로 진행되었으며, '마츠와'로 큰 인기를 얻고 있던 여성 듀오 아민과 함께 출연했다.
수염이 짙어 '종규님'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또한, 가게우라 마사시와는 마쓰야마 상업고등학교와 릿쿄 대학 시절부터 친한 사이였으며, 그의 여러 일화를 후세에 전하기도 했다.
나고야 구장이 드래곤스 1군 홈구장으로서 마지막 해였던 1996년 말, 그곳에서 열린 주니치 대 요미우리 OB전에 참가했다. 요미우리의 벳쇼 타케히코와의 '합계 156세' 맞대결로 주목받았으나, 당시 82세의 고령이었기에 타석 뒤에서 사감 시절 기숙사생이었던 우시지마 카즈히코가 대주자 역할을 맡아, 쓰보우치가 치는 순간 우시지마가 1루로 달리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듬해 사망하여 이것이 그의 마지막 공식 석상 모습이 되었다.
쟈니 키타가와의 아버지 아키미치와 아는 사이였으며 한때 그의 매니저를 맡기도 했다. 이 인연으로 쟈니 키타가와와도 안면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5. 주요 기록
- 도루왕: 2회(1941년, 1942년)
- 베스트 나인: 2회 (외야수 부문: 1947년, 1948년)
- 야구 명예의 전당 경기자 표창 (1992년)
'''주요 기록'''
'''기타 기록'''
- 시즌 6 삼진: 1946년 ※시즌 100경기 이상 규정 타석 도달자 중 최소 타이
- 1이닝 3도루: 1943년 10월 3일, 대 도쿄 교진군 전, 5회에 2루 도루・3루 도루・홈스틸 ※역대 4번째[8]
- 25경기 연속 안타: 1948년 6월 28일 ~ 9월 5일
- 올스타 게임 출장: 1회 (1951년)
6. 대중 매체
주니치 드래건스가 세 번째 리그 우승을 달성한 1982년, TBS의 인기 프로그램 '더 베스트텐'에 출연했다. 당시 자신이 사감을 맡고 있던 드래곤스 합숙소(아이치현 나고야시 나카무라구 소재)에서 생방송으로 진행되었으며, '마츠와'(待つわ)로 인기를 얻고 있던 여성 듀오 아민과 함께 출연했다.
나고야 구장이 드래곤스의 1군 홈구장 역할을 마친 1996년 말, 같은 구장에서 열린 주니치 대 요미우리 OB전에 출전했다. 이 경기에서 요미우리의 벳쇼 다케히코와 '합계 156세' 대결을 펼쳐 야구장을 뜨겁게 달궜다. 하지만 당시 82세의 고령이었기 때문에, 타석 뒤에서 기숙사 사감 시절의 기숙사생이었던 우시지마 가즈히코가 대주자 역할을 맡아 쓰보우치가 타격하는 동시에 1루로 달렸다. 쓰보우치는 이듬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이 경기가 그의 마지막 공식 석상 모습이 되었다.
7. 연도별 성적
쓰보우치 미치노리의 선수 및 감독 시절 주요 통산 기록은 다음과 같다.
선수로는 통산 15시즌 동안 1417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62, 1472안타, 34홈런, 462타점, 344도루를 기록했다. 감독으로는 통산 5시즌 동안 509경기를 지휘하며 241승 256패 12무, 승률 .485를 기록했다.
자세한 연도별 상세 성적은 아래 선수 시절 타격 성적 및 감독 시절 성적 문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
7. 1. 선수
쓰보우치 미치노리는 일본 프로 야구 초창기부터 활약한 선수이다. 선수 시절 초기 이름은 '''쓰보우치 미치노리'''(坪内 道則일본어)였으나, 1949년부터는 '''쓰보우치 미치노리'''(坪内 道典일본어)로 개명하여 활동했다.1936년 추계 시즌에 다이도쿄 군 소속으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 팀은 이후 라이온 군(1937년 추계 변경), 아사히 군(1941년 변경)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는 팀명 변경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아사히 군까지 활약했다.
태평양 전쟁 이후인 1946년에는 골드 스타로 이적했으며, 이 팀은 1947년에 긴세이 스타스로 구단명을 변경했다. 1949년부터는 주니치 드래건스로 팀을 옮겼고, 주니치 드래건스는 1951년에 나고야 드래건스로 구단명을 변경했다. 그는 나고야 드래건스 시절까지 선수로 활동했다.
선수 시절 통산 15시즌 동안 1417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62, 1472안타, 34홈런, 462타점, 344도루를 기록했다. 특히 도루와 몸에 맞는 공 부문에서 여러 차례 리그 1위를 차지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7. 1. 1. 타격 성적
라이온아사히
긴세이
나고야